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추천 DVD / 블루레이 280

백야

1986년 한국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그 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영화가 국내 개봉했다. 테일러 핵포드(Taylor Hackford) 감독의 '백야'(White Nights, 1985년)다. 당시 서울에서 유일한 70미리 상영관이었던 대한극장에서 이 영화를 하루에 내리 3번을 보았다. 새내기 대학생 때인 만큼 할 일이 많았던 친구는 첫 회를 같이 본 후 후다닥 달아나버렸지만 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와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의 노래에 매료돼 움직일 수 없었다. 이후 바리시니코프의 팬이 돼 그가 출연한 영화 '지젤'도 보았고 나중에 '백야'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영상이 뭉개질 때까지 봤다. 비소츠키 노래도 마찬가..

피와 뼈

재일교포 감독인 최양일이 만든 '피와 뼈'(血と骨, 2004년)는 강렬한 제목만큼이나 흡입력 강한 작품이다. 제11회 야마모토 주고로 문학상을 수상한 양석일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 때 오사카로 건너가 파란만장한 삶을 산 김준평(기타노 다케시 北野武)이라는 사내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 꿈을 안고 도일한 그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에게 더없이 폭력적이고 위악적이다. 아내와 자식들은 물론이고 타인에게도 가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그는 사람들에게 가장이자 아버지이기 이전에 동물적인 본능을 내세운 남자이며 광기에 휩싸인 괴물로 기억된다. 최 감독은 일본 무사들의 동성애를 다룬 '고하토'에서 함께 연기한 기타노 다케시를 주연으로 기용해 세상을 험하게 산 사내와 가족의 이야기를 선 굵은 그림으로 보여준..

친구 (UE)

어제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비를 보면 떠오르는 영화가 두 편 있는데 하나는 프랑스 영화 '빗속의 방문객'이고 하나는 바로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년)다. 안타깝게도 '빗속의 방문객'은 프랑스에서도 아직 DVD가 출시되지 않아서 다시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DVD로 갖고 있기에 비가 간혹 본다. '친구'와 관련해 두 가지 기억이 있다. 모두 사람에 대한 기억이고, 그것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한 사람은 영화를 찍은 황기석 촬영감독이고, 또 한 사람은 배우 유오성이다. 2003년 여름, 서울 강남의 오피스텔에서 황기석 촬영감독을 만났다. 당시 그가 작업실로 쓰던 오피스텔에 '친구'의 조감독이었던 안권태 감독이 와서 입봉작 '우..

남과 여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 감독의 '남과 여'(A Man And A Woman, 1966년)는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아름다운 사랑의 서정시 같은 영화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프랑스 해안가 풍경 위로 안타까운 연인의 사랑 이야기와 프란시스 레이의 감미로운 음악이 바람이 돼서 흐른다. 내용은 미망인이 된 여인과 홀아비인 남자(장 루이 트랜티냥 Jean-Louis Trintignant)이 주말에 각각 자식의 기숙학교를 방문했다가 눈이 맞아 사랑을 느끼는 내용이다. 어찌 보면 '비포 선라이즈' 풍 영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절제된 대사와 뮤지컬처럼 등장인물의 심정을 노래로 표현한 점, 컬러와 흑백을 오가는 독특한 영상으로 당시 화제가 됐다. 덕분에 그해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외국..

고래의 도약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겸 애니메이터 타무라 시게루(田村茂)의 작품들은 손으로 떠올린 맑은 샘물 같다. 그만큼 맑고 투명해 보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대부분 좋아한다. 그의 두 번째 작품 '고래의 도약'(クジラの 跳躍, 1998년)도 마찬가지. 이 작품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찰나인 순간을 6시간으로 늘여서 사는 판타지 세계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유리로 된 바다를 걸어 다니며 허공에 떠있는 날치를 과일 따듯 손으로 따서 바구니에 담는다. 타무라 시게루는 이처럼 꿈같은 이야기를 22분 동안 한없이 맑고 투명한 색감의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놓는다. 손으로 그린 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순전히 컴퓨터로만 작업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손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