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학창 시절에 즐겨 보던 만화책이 있다.
성심도서라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출판사에서 낸 '신 루팡 3세'라는 시리즈 만화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해적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조악한 인쇄의 이 만화는 일본 만화가 몽키 펀치가 그린 '루팡 3세'를 번역해 그대로 출간한 시리즈였다.
각 권마다 여러 개의 단편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만화책이 인기였던 것은 꽤 야하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루팡 3세는 여자를 엄청 밝히는 호색한이어서 온갖 여자들과 가리지 않고 잠자리를 갖는다.
거기에 난폭하고 잔인한 액션, 말이 되지 않지만 황당하고 기발한 도주와 절도술,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유머까지 만화책이 줄 수 있는 온갖 재미를 선사했다.
다만 1960, 70년대 소설책처럼 세로쓰기여서 읽기 불편하고, 루팡 3세의 친구이자 동료인 총잡이 지겐 다이스케를 쓰기모토, 형사 제니가타를 산케이로 이름을 바꿔 놓은 단점이 있다.
그 바람에 오래 뒤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 이름이 달라 이상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시리즈 중에 몇 권만 남아 있지만 옛 생각이 나서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ルパン三世: カリオストロの城, 1979년)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작품이다.
미야자키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그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이기도 하다.
이 작품으로 미야자키 감독은 주목을 받았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원작의 재미요소인 성인 코드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
그렇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만화잡지 편집자인 스즈키 토시오를 만나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을 논하게 되니, 미야자키 감독으로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풍경에 공을 들이고 독특한 메카닉을 도입해 동화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미야자키 감독 특유의 작풍이 잘 살아 있다.
마치 크레파스나 수채화 그림을 보는 듯한 아련한 느낌의 풍경, 동그스름한 선을 살린 인물 묘사도 여전하다.
내용은 세계적인 도둑 루팡 3세가 대량으로 위폐를 찍어내는 가상의 국가 칼리오스트로에 잠입해 악당들과 대결하고 공주를 구하는 내용이다.
용 또는 마귀, 악당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하는 숱한 유럽식 동화나 전설과 기본 뼈대를 같이 한다.
비록 성인 코드는 빠졌지만 신출귀몰한 루팡 3세의 활약과 총잡이 지겐의 절묘한 총솜씨, 고에몽의 귀신같은 칼솜씨 등 캐릭터의 특징을 잘 살렸다.
여기에 가벼운 유머를 가미해 가족들이 보기 좋은 모험활극으로 만든 점이 특징.
국내에서는 1990년대 지상파 방송에서 특집으로 방영한 적이 있으나 왜색 사무라이인 고에몽 등장 장면을 난도질해 온전한 작품이 방영되지는 못했다.
후에 대여용 비디오테이프로 출시됐으며 제대로 된 극장 상영은 올해 지난 5월 처음 이뤄졌다.
그러나 불과 1주일 만에 내려가 개봉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다행히 이번에 블루레이 타이틀이 국내 출시되면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돼 반갑다.
1080p 풀 HD의 16 대 9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무려 30여년 전 작품인데도 잡티 하나없이 깨끗하고 색감이 잘 살아 있다.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도 적당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자동차 소리와 생활 소음이 리어에서 흘러나오는 등 채널별 음향 안배를 잘했다.
부록으로 그림 콘티와 극장용 예고편, 크레딧을 넣지 않은 인트로 화면 등이 실렸다.
케이스 또한 일본에서 출시된 지브리 스튜디오 시리즈와 유사하게 만들어 소장 가치를 높였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몽키 펀치가 1967년부터 만화잡지에 연재한 원작 만화는 엄청난 인기를 끌며 숱한 TV애니메이션 시리즈, 극장용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 뮤지컬, 콘솔 게임 등으로 제작됐다.
루팡 3세의 동료인 총잡이 지겐. 원작 만화의 루팡 3세는 기존 만화처럼 정의롭고 용감한 의리파 주인공이 아니다. 여자를 엄청 밝히며 이득을 위해 서슴치 않고 동료를 속이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서정적인 풍경을 잘 살렸다. 모리스 르블랑이 루팡과 셜록 홈즈의 대결을 썼던 것처럼 이 시리즈 또한 루팡 3세와 명탐정 코난이 대결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루팡 3세의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 야마다 야스오는 1995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몽키 펀치는 비틀즈를 흉내내 루팡 3세의 머리를 장발로 그리려고 했으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짧은 머리로 고쳤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미래소년 코난' 등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는 날틀과 비슷한 비행체가 등장. 원래 이 작품이 모티브로 삼은 작품은 미국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 '톰과 제리'다. 원작자인 몽키 펀치가 이 작품을 워낙 좋아해 톰과 제리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제목 및 악당과 연관있는 칼리오스트로 백작은 실존 인물이다. 본명이 주세페 발사모인 그는 유명한 연금술사로, 비밀결사인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덕분에 이교도 관련 서적에 자주 등장하는 그는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옥사했다.
세상에 못자르는게 없다는 검객 고에몬도 루팡 3세의 동료다. 원작자인 몽키 펀치의 본명은 카토 카즈히코. 몽키펀치는 만화잡지사에서 외국작가 느낌을 주기 위해 억지로 붙인 필명이다.
톰 역할을 하는 제니가타 경부. 원작만화에서는 번번히 루팡 3세에게 골탕을 먹는다.
이 작품은 유럽을 동경하는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답게 르네상스적인 이야기로 흐른다. 이상적인 유럽의 모델로 고대 로마제국을 꿈꿨던 르네상스 예술가 및 정치가들처럼 이 작품 속 비밀의 시원은 고대 로마도시다.
루팡 3세와 경쟁자이면서 때로는 동료, 때로는 연인인 미네 후지코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 몽키 펀치가 하마나카 마을에 거주하는 클래스 메이트를 모델로 그렸다.
처음에 연출 제의를 받은 오오츠카 야스오가 이 작품의 캐릭터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후배인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연출이 넘어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오츠카를 이 작품의 작화 감독으로 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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