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1997년)는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독특하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비행 장면 등 하늘에 대한 동경과 서구식 이야기로 풀어가는 서양 문화에 대한 집착이 보이지 않는다.
'이웃집 토토로'처럼 일본 고유의 문화를 다룬, 탈 서양적인 작품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은 일본 고유의 전승 설화에 의존하고 있다.
내용은 인간의 자연파괴에 분노한 짐승들이 인간을 공격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주인공과 원령공주, 즉 모노노케 히메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유럽의 민담을 1740년 프랑스 여류작가 가브리엘 수잔 바르보 드 빌레느브가 정리한 '미녀와 야수'의 흔적을 찾기도 하는데, 하야오 감독은 여기서 모티브만 빌렸다.
하야오 감독은 잔 마리 르 프랭스 드 보몽이 편집한 '미녀와 야수'를 읽고 1980년대 초반 '도깨비 각시'라는 작품을 기획했다가 무산된 뒤 이를 '모노노케 히메'의 모티브로 삼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본령은 일본 북해도를 중심으로 한 아이누 신화다.
에미시, 에비즈, 에조 등으로 둘린 아이누족은 일본의 고대 문화인 조몬 문화를 일군 본류 민족이었으나 농사를 지으며 정착한 야요이족에게 밀려나 급격히 쇠퇴했다.
특히 아이누족은 일본 야마토 정권에 반대하면서 오랜 세월 탄압과 차별을 받아 지금은 박물관에 표본으로 전시될 만큼 거의 사라진 민족으로 전락했다.
사냥과 고기잡이로 생활한 아이누족의 특징 중 하나가 산을 지배하는 거대한 짐승신 신화를 믿는 점이다.
이는 고스란히 이 작품의 거대한 들개신, 멧돼지신 등으로 표현됐다.
특히 주인공 청년의 부족이 아이누족의 다른 이름인 에미시족으로 나온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짐승신을 믿었던 아이누족은 자신들의 흰 들개의 자손이라는 신화를 갖고 있으며, 그 바람에 '늑대아이'처럼 사람이 늑대나 개와 결혼하는 이야기를 많이 낳게 된다.
그만큼 이 작품에 나오는 짐승신들과 원령공주, 에미시족 이야기는 아이누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모노노케, 즉 원령 사상이 접목됐다.
원령은 한을 품고 죽은 원혼으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사람들은 원령을 신으로 떠받든다.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을 군신으로 추앙하는 일본의 신사참배와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다.
작품 속 사람들에 공격을 받고 한을 품은 채 죽어 변화하는 짐승신들과 세상을 정화하는 시시가미의 존재 등이 바로 일본에 뿌리깊은 토템인 원령사상과 맞닿아 있다.
어찌보면 이런 점들이 이 작품에 대한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반전의 메시지를 강조하면서도 일본 군국주의의 흔적을 작품 속 여기저기에 집어 넣는 하야오 감독과 지브리스튜디오의 이율배반적인 모순과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부르짖는 메시지를 신화를 빌려 훌륭한 이야기로 엮어낸 하야오 감독의 연출력은 높이 살 만 하다.
여기에 서정적인 지브리 스튜디오 특유의 손그림과 진한 색감이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준다.
기존 지브리 작품에서는 보이지 않던 신체절단 등 잔혹한 폭력묘사가 과감히 사용된 점도 강한 인상에 한 몫 했다.
장쾌한 이야기 속에 잘 녹아든 메시지, 아름다운 그림과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잘 어우러진 수작이다.
어찌보면 일본 고유의 문화를 세계화시켜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이 작품의 블루레이는 국내에서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고 일본에서만 지브리 컬렉션으로 출시됐는데, 다행히 영화 본편에 한글 자막 및 우리말 녹음이 들어 있다
1080p 풀HD의 16 대 9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필름 특유의 입자감이 느껴지면서도 색감이 선명하고 화사해 쨍한 느낌의 화질을 자랑한다.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리어에서 멀리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리는 등 서라운드 효과가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부록으로 하야오 감독의 미국 방문 모습이 HD 영상으로 수록됐는데, 한글 자막은 없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짐승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길을 떠나는 아시타카는 에미시족으로 나온다. 색이 진하며 눈동자가 커다란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야오 감독 작품치고는 독특하게 잔혹 영상이 과감하게 표현됐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의 원안과 각본을 썼고 연출까지 맡았다.
흰 들개신과 이들이 키운 사람의 자식인 원령공주는 아이누족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음악은 히사이시 조가 맡았고, 주제가는 요시카즈 메라가 불렀다.
20억엔의 제작비를 들여 3년 동안 만든 이 작품은 일본에서만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108억엔의 수익을 올렸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1982년 'ET'가 갖고 있던 기록을 깨고 흥행 1위에 올라 '타이타닉'이 일본에서 개봉할 때까지 1위 자리를 지켰다.
이 작품은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이 된 야쿠시마섬을 배경으로 했다. 규슈 남쪽에 위치한 가고시마현 소속인 이 섬에는 일본 100대 명산 중 하나인 1935미터 높이의 미야노우라다케가 있다.
아이누족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이후 일본의 강력한 중앙집권정책 및 획일화 정책에 따라 독특한 문화를 잃고 극소수만 살아남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북해도 박물관에 흔적이 보존돼 있다.
시대적 배경은 일본에 철기문화가 시작된 무로마치 막부 시절인 14세기다.
북해도 신화에서는 사슴을 하늘의 신이 내려보낸 존재로 본다. 미국 개봉시 배급을 맡은 디즈니 계열의 미라맥스에서 편집을 제안했으나 하야오 감독은 해외 개봉시 편집과 삭제를 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 이후 은퇴를 선언했다. 모든 제작과정을 총괄하는게 너무 힘든데다 시력저하가 심각했기 때문. 하지만 후계자로 낙점한 '귀를 기울이면'을 만든 곤도 요시후미가 갑자기 동맥파열로 1998년 사망하면서 할 수 없이 하야오 감독이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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