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어느 멋진 일요일

울프팩 2012. 11. 26. 20:52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초창기 작품 '멋진 일요일'(1947년)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다.
어느 가난한 연인의 일요일 한때 데이트를 다룬 이 작품을 보면 두 사람의 로맨스보다 뒷배경에 눈이 간다.

무너진 건물 투성이인 폐허, 꼬질꼬질한 거지소년,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과 암표상 등 요즘 도쿄와 비교하면 천양지차의 풍경이다.
실제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비참했다.

한도 가즈토시가 쓴 책 <쇼와사>를 보면 당시 모습이 생생히 기록돼 있는데, 도쿄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전쟁 때 폭격으로 생산시설이 모두 파괴되는 바람에 미 군정은 식량통제법을 만들어 1949년까지 배급을 실시했다.

그러나 1인당 하루 300g의 배급량은 턱없이 부족해 당시 기록에 따르면 1,000만명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암시장이 번성했다.

먹을 것 부터 입고 쓰는 생필품을 암시장에 의존하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서민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졌다.
당시 기록을 보면 공무원 월급이 40엔이었는데 암시장에서 거래된 쌀 1.4kg 가격이 70엔이었다.

설탕 3.75kg은 무려 1,000엔이어서 월 520엔을 받는 수상도 쉽게 사기 힘들었다.
사는 꼴도 말이 아니었다.

벼룩과 바퀴벌레가 없는 집이 없었고, 사람들은 온 몸에 이가 들끓었다.
덩달이 질병도 만연해 미 군정은 서둘러 DDT를 뿌려 이를 잡았고 페니실린을 보급했다.

또 최초로 복권이 발매돼 인기를 끌었다.
반면 일본 정부가 미군들을 위해 만든 공창 등 위락시설은 번성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양가집 처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만들어 위안부를 모집했다.
도쿄 오타쿠의 오모리에서 문을 연 위안시설에는 1,36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공창 뿐 아니라 카바레, 바 등 미군들을 겨냥한 유흥업소도 번창하면서 여기서 일하는 여성들도 늘어났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마치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의 전후 네오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도둑'처럼 이 같은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여기에 몽타주 기법으로 적절하게 끼워넣은 은유와 비유적인 영상들은 당시 못살고 못먹던 서민들의 비애를 대변한다.
그러면서도 아키라 감독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커피 한 잔 마실 돈이 없는 연인들은 상상 속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울면서 꿈을 꾸는 판타지 같은 작품이다.

우리도 비슷한 시절을 겪고 일어선 만큼 비단 이 영화가 일본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4 대 3 풀스크린의 DVD 타이틀은 화질이 좋지 않다.
무려 65년전 작품인 만큼 프레임이 흔들리고 온갖 잡티와 필름노이즈가 난무한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2.0 채널을 지원하며 부록은 없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신흥모범주택전시'라는 세로 한자가 말해주듯 당시 신식 집의 견본이다. 요즘으로 치면 모델하우스 같은 곳으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내 집을 갖는다는 것은 큰 꿈이었다.
전후 복구가 채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도쿄 한 복판에도 비포장도로가 많았다. "요즘은 암거래가 붐"이라는 대사처럼 전후 일본은 그만큼 못먹고 못살았다.
연인들의 휴일 데이트라는게 별 게 없다. 노상에 앉아 만쥬를 먹고 이야기 하는 정도가 전부다. 경쾌한 영화 음악도 좋다. 중간에 '반짝 반짝 작은 별'이란 미국 동요도 삽입곡으로 쓰였다.
연인을 맡은 누마사키 이사오와 나카키타 치에코. 배우답지 않게 복스러운 인상이다. 당시 제작사인 도호는 유명 배우들이 회사를 떠나면서 신인들을 주연으로 썼다. 그 바람에 길거리 촬영을 해도 사람들이 배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단다.
과거 동물원은 가난한 연인들의 좋은 데이트코스였다. 우리도 창경궁이 제 이름을 찾기 이전인 옛날 창경원에서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이 많았다. "짐승은 행복할지어다, 인플레이션이 없으니"라는 대사처럼 가난한 연인들은 오히려 우리에 갇힌 동물들을 부러워 한다.
커피 한 잔 변변히 마실 돈 없고 집이 없어 결혼도 못하는 연인들은 "염소는 종이라도 먹고, 기린은 스팀들어오는 우리에 산다"며 동물원 짐승들을 부러워 한다.
암표상들과 시비가 붙어 뭇매를 맞는 주인공. 1980년대 우리네 극장가에도 암표상이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처럼 도쿄도 공습의 여파로 곳곳이 폐허가 됐다. 실제 거리에 뛰노는 아이들의 입성을 보면 예전 우리네 전후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이색적으로 배우들이 카메라를 향해 굽신하며 "불쌍한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달라"고 호소하는 연인을 보면 절로 격려의 손뼉을 치고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 식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호소법이다.
그렇게 연인들은 마음속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며 힘을 냈지만, 당장 내일 살 길이 막막하다. 헤어지는 순간 수심이 가득한 표정에서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참으로 냉정한 리얼리즘이다.
이키루 라쇼몽 어느멋진 일요일
미즈미 겐지
꽃이 있는 식탁
고은경 저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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