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한국의 체 게바라, 이현상 - '이현상 평전'

울프팩 2010. 3. 21. 22:29

고교 시절인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쿠바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모르는 사람이 꽤 많았다.
오랜 세월 철저한 반공 교육과 숱한 서적들이 금서로 묶인 탓이었다.

괜시리 수업 시간에 체 게바라와 보 구엔 지압을 아는 척 했다가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떤 선생 덕에 한동안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체 게바라는 티셔츠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패션 스타가 됐다.

바야흐로 혁명도 상품이 된 것이다.
패션 상품 뿐 아니라 책과 영화 덕분에 체 게바라는 이제 대중적 인물이 됐다.

하지만 의외로 한국판 체 게바라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항일 독립운동으로 청춘을 보낸 뒤 6.25를 거치며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숨져간 이현상은 체 게바라 못지 않은 혁명가였다.

이현상과 체 게바라는 서로 많이 닮았다.
이현상은 만석꾼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의 고대 법대를 다닌 지식인이었고,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의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둘 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혁명에 온 몸을 바쳤고, 게릴라 활동 중 산 속에서 총을 맞고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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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1905년 충남 금산에서 땅 부자인 양반집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지주에 양반이었지만 어질고 정이 많아 면장을 지내며 소작농의 세금까지 대납해 줄 정도로 선정을 베풀어 공덕비까지 건립됐다.

이현상은 어려서 서당을 다녔고, 뒤늦게 중앙고보에 진학해 6.10 만세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퇴학당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 법과, 즉 지금의 고대 법대에 입학해 조선공산당에 가입하며 사회주의에 눈을 떴다.

그는 일제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으로 4년간 옥살이 한 뒤 감옥에서 만난 김삼룡, 이주하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해 항일운동을 벌인다.
당시 항일 운동에 사회주의자들이 앞장섰던 것은 친일파들이 대게 지주 아니면 자본가들이어서 곧 부르주아 타도가 항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현상은 경성트로이카로 다시 옥살이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감옥은 곧 학교다.

그 곳에서 해방 후 남로당의 주역이 되는 이관술, 정태식 등을 만났고, 이들과의 인연이 박헌영 영입으로 이어진다.
해방 후 이현상은 이들과 남조선노동당, 즉 남로당을 결성한다.

그는 우익들의 폭력을 지켜보며 무장투쟁을 준비했고, 48년 월북해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훈련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현상은 무조건 폭력을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48년 10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 내 좌익들이 일으킨 여순반란을 혁명 역량의 손실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한 그는 지리산 유격대를 결성해 사령관이 된다.
그때부터 그는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5년여 세월을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빨치산의 전설이 된다.

빨치산 시절 그는 대원들을 자식처럼 아끼며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깍듯한 존대말을 써가며 인격적으로 대우해 모두에게 인자한 '선생님'으로 불렸다.
심지어 붙잡은 포로들까지 무사히 돌려보내 온정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싸움터에서는 신출귀몰한 전술로 미군과 한국군에게 타격을 입혀 우선 토벌의 대상이 된다.
오죽했으면 미군은 북한과 휴전협상기간 전선에 있던 한국군 4만명을 뒤로 빼내 남부군 토벌로 돌린다.

하지만 비운의 혁명가는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을 받는다.
미군은 휴전협상에서 골치거리를 없애고자 김일성에게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 이현상 부대를 북으로 데려가라고 먼저 제의했으나 김일성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훗날 남한에 은둔해 후방 활동을 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 사이 북에서 요직을 차지했던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원들은 한국전쟁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미제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김일성을 대신해 총살당한다.
그렇게 북으로 간 남로당원들이 처형당한 뒤 같은 남로당 핵심간부였던 이현상도 연대책임을 지듯 지리산에서 자아비판을 당한 뒤 평당원으로 강등되고 남부군은 해체된다.

홀로 버려지다시피 지리산에 남은 49세 중년의 빨치산 이현상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 달이 훨씬 지난 1953년 9월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국군 토벌대의 총을 맞고 사망한다.
경찰은 빨치산의 최후를 똑똑히 알리겠다며 이현상의 시신을 서울 창경원과 성북 경찰서 앞에 한동안 전시한 뒤 토벌 대장이었던 차일혁이 화장을 해서 섬진강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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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최후를 다룬 신문보도]

남로당원 가운데 유일하게 김일성이 아꼈던 이현상은 사후 15년이 지난 1968년 북한 애국열사릉에 첫 번째 열사로 추서돼 가묘가 안치됐으며 1990년에는 북한 조국통일상으로 추서됐다.
그의 막내 딸 이상진은 현재 북한의 당 관료가 돼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시 만수대 의사당을 안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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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애국열사릉에 조성된 이현상의 가묘. 한국전쟁 전에 월북한 부인 최문기씨가 함께 안장됐다.]

체 게바라 못지 않게 훌륭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현상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자료 탓에 이태의 '남부군', 이병주의 '지리산' 등 일부 작가들이 관련 소설을 내긴 했으나 왜곡되거나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다.

그 와중에 안재성이 펴낸 '이현상 평전'(실천문학사)은 그나마 이현상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려낸 유일한 서적이라는 점에서 반가운 책이다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그의 삶을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체 게바라나 이현상 모두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들이다.
다만, 체 게바라에 비해 이현상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참고로 이현상의 아호는 그의 불꽃 같은 삶을 예견하듯 불뫼, 화산(火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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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마지막 은신처였던 지리산 빗점골]

덧붙임)======================================================================================

'이현상 평전'을 쓴 작가 안재성은 2007년에 책을 낸 뒤 중앙일보에 희한한 정정광고를 게재했다.
이현상의 시체를 거둔 경찰 토벌대장 차일혁의 최후를 다룬 부분에 대한 정정광고였다.

차일혁 총경은 공주경찰서장 재직시절인 1958년에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금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그런데 안재성은 책이 출간된 뒤 차 총경의 후손에게서 연락을 받고 놀라운 진상을 듣게 된다.

차 총경은 일제 시대 만주에서 사회주의 무장단체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좌익들에게 온정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곤란을 겪는다.
아들에게 이현상의 유품을 건네 줄 정도로 남부군에 대해 각별한 생각을 가졌던 차 총경은 사망 당일 가족과 함께 금강으로 물놀이를 간다.

수영을 아주 잘했던 차 총경은 당시 11세였던 아들을 강 가운데 바위에 앉혀놓고 조선의용군 노래인 '볼가강의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들이 이를 보고 엉엉 울며 아버지를 불렀으나 그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 뒤 19시간이 지나서 그의 시체는 금강 물 속에 가라앉은 인민군 탱크를 끌어안은 채 발견됐다.

작가 안재성은 이 사실을 제대로 알리고자 신문에 광고를 냈던 것.
참으로 가슴이 먹먹한 역사적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 1
이병주 저
남부군
이태 저
이현상 평전
안재성 저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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