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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DVD / 블루레이

화양연화 (블루레이)

울프팩 2014. 6. 4. 06:23

왕가위 감독의 걸작 '화양연화'(2000년)는 엇갈린 인연과 사랑에 대한 영화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연기한 남과 여는 묘하게도 얽힌 인연 때문에 바람을 피는 불륜의 관계이지만, 그들은 끝까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며 지고지순한 사랑을 고집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이상의 진전을 원치 않고 서로의 사랑을 가슴에 묻는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시간이 흘러 서로가 돌아보았을 때 그들의 가슴에 남는 것은 안타까운 그리움과 회한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나간 사랑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를 의미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로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낯선 남녀가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으로 발전했다가 남남이 된 후 서로가 그리워 하는 감정의 변화를 농밀한 시간의 압축을 통해 훌륭하게 묘사했다.

 

특히 왕 감독은 채로 걸러내듯 안타까운 사랑만 의도적으로 가슴아프게 담아 냈다.

이번에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DVD 타이틀에 수록된 삭제장면을 보면 양조위와 장만옥이 호텔에서 옷을 벗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정사 장면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이런 장면들을 보면 다분히 그들의 사랑이 플라토닉한 인연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헤어진 두 남녀는 나중에 각각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은 뒤 재회하지만 이런 부분을 편집에서 모두 들어냈다.

 

왕 감독은 그들이 집착한 '안타까운 사랑'이 다르게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왕 감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1960년대 홍콩의 정서가 강하게 배어 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왕 감독처럼 중국 상하이에서 건너와 홍콩에 정착한 사람들 얘기다.

이들은 중국 본토의 유교적 정서를 강하게 갖고 있어서 이웃과 적극 교류하며 남의 시선을 의식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을 금기시한다.

 

중국 본토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이들은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며서 1967년 일제히 홍콩을 빠져나가는 등 심하게 흔들린다.

영화는 바로 이 직전인 1966년, 즉 왕 감독이 홍콩의 화려했던 시절로 꼽는 1960년대 중반까지만 보여주고 막을 내린다.

 

이 같은 시대적 정서를 함유한 영화는 왕 감독 특유의 기법으로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됐다.

왕 감독은 이 작품에서 여러가지 변화를 시도했다.

 

이전 작품과 달리 여주인공의 끊임없이 달라지는 의상을 통해 시각적 변화를 시도했고, 고속 촬영을 고집했던 과거와 달리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이 찍은 슬로 모션 영상을 통해 느림의 미학을 보여줬다.

특히 시게루 우메바야시의 느린 왈츠풍 음악과 함께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

 

어찌보면 이 작품은 연출력의 절정을 보여준 왕 감독이나 너무나 고혹적이었던 장만옥에게도 가장 빛났던 한때인 화양연화가 아니었나 싶다.

그만큼 왕 감독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빼놓지 말고 봐야 할 스타일리쉬한 걸작이다.

 

1080p 풀HD의 1.78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평범한 화질이다.

물론 DVD와 비교하면 색감이 월등 좋아졌지만 필름 입자감이 거칠게 느껴지는 영상이다.

 

DVD 타이틀과 비교해 보면, DVD 타이틀이 색온도가 높아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푸른 색조가 강했다면, 블루레이 타이틀은 색온도를 낮춰 화면 전체를 덮는 푸른 색조가 가라앉으며 차분하고 명확한 느낌이 든다.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간헐적인 효과음을 리어에 배치해 간간히 서라운드 효과가 들린다.

 

안타까운 것은 부록이다.

FE 버전의 DVD 타이틀에 수록된 삭제장면, 감독 인터뷰, 제작과정 등이 모두 빠지고 예고편만 하나 달랑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제목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의미한다. 왕 감독은 어린 시절을 보낸 1960년대 화려했던 홍콩을 그렇게 기억한다. 이 작품은 조명과 앵글의 높이가 대체로 낮다. 왕 감독이 어린 시절 본 시점을 반영한 것이다.
왕 감독 영화의 특징인 시계, 둥근 창 등 반복적 이미지가 사용된다. 영상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맞춤옷처럼 딱 맞아 떨어졌던 시게루 우메바야시의 음악이다. 실외 장면은 방콕, 실내 촬영은 홍콩에서 대부분 진행했다.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가 부드럽게 흐르는 가운데 붉은 커튼이 슬로 모션으로 흩날리는 장면은 한 편의 시다. 영화 속 호텔로 나온 곳은 원래 영국군을 위한 낡은 병원이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해체를 기다리며 남아있던 것을 호텔처럼 꾸며 촬영했다. 
양조위가 맡은 신문기자 역할은 홍콩의 유명한 작가 김용과 닮았다. 상하이 부근 항저우에서 태어난 김용의 본명은 사량용이다. 그는 1950년대 홍콩에 건너와 김용이라는 필명을 쓰며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명보'라는 신문에 1955년부터 무협소설을 연재했다.
장만옥은 높게 세운 옷깃과 긴 여체의 곡선을 돋보이게 해준 치파오가 너무 잘 어울렸다. 치파오는 중국 전통의상이 아니라 중화민국 시절 중국에서 유행한 서구스타일의 옷이다. 왕 감독은 대본없이 찍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 역시 쪽대본으로 촬영했다. 
이 영화의 특징은 마치 숨어서 두 연인을 지켜보는 듯한 앵글이다.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 감독은 건물이나 물건, 창살 틈 뒤에서 인물들을 촬영해 마치 관객이 이웃의 시선으로 엿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왕 감독은 이런 기법이 서스펜스 영화와 같은 효과를 준다고 봤다. 
극중 양조위의 친구로 나오는 펭 역할은 배우가 아닌 소품 담당 시우핀 람이 연기했다. 그는 연기를 이 작품에서 처음했다. 
왕 감독은 홍콩 반환 시점이던 1997년에 이 작품에 착수했다. 하지만 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투자자들도 타격을 받아 작업이 중단됐다. 결국 왕 감독이 유럽 투자자들에게 투자를 받아 촬영이 재개됐는데, 그 바람에 왕 감독의 후속작 '2046'과 촬영이 겹쳐 두 작품을 동시에 찍었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2046' 촬영을 위해 들른 방콕에서 찍었다. 
원래 두 연인이 묵는 호텔 방 번호는 307호였는데 '2046'을 찍으며 2046호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두 작품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2046이라는 숫자는 중국 정부가 홍콩을 1997년부터 50년간 다른 나라처럼 완전히 자유롭게 운영하다가 중국 본토에 완전 귀속시키는 2046년을 의미한다.
제작자가 추천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촬영. 왕 감독은 여기서 두 남녀가 재회하는 장면을 찍었으나 편집에서 뺐다. 왕 감독은 1960년대 기자들 이야기를 많이 다룬 작가 류위장의 영향을 받아 양조위 역할을 기자로 설정했다. 영화에 삽입된 글들이 모두 류위장 소설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왕 감독은 음식만 보고 몇 월인 지 알 수 있도록 음식에 많은 변화를 줬다. 상하이 사람들은 계절에 따라 다른 채소를 먹었다. 그래서 상하이 출신이라면 영화 속 음식만 보고도 몇 월인 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1960년대 홍콩에서 라틴 음악이 유행했다. 그래서 왕 감독의 모친이 좋아한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를 삽입했다. 슬로모션으로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사람들 위로 흐르던 시게루 우메바야시가 작곡한 '유메지'의 비감어린 선율 또한 감동적이다. 
양조위는 저 돌 틈에 무엇을 묻었을까. 못다한 사랑 고백일까, 회한에 찬 소리없는 눈물일까. 모두 세월이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