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이경영 24

신세계

박훈정 감독의 영화 '신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들고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내용은 홍콩영화 '무간도'처럼 폭력 조직의 중간 보스로 파고 든 경찰이 범죄조직을 와해시키는 이야기. 설정부터 그러니, 정체가 드러날까 봐 가슴을 조이는 경찰만큼이나 보는 사람도 숨이 가쁘다.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로선 최고지만, 칼 끝 같은 긴장 속에 한 치의 여유도 없다는 점이 문제다. 각종 의심과 암투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느라 뻣뻣하게 굳어있는 등장인물들의 스트레스가 보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된다. 그만큼 일말의 휴식같은 러브라인이나 웃음 코드의 부재가 아쉽다. 대신 그 자리를 권력을 노린 조폭들의 쌍욕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영화 2013.02.23

베를린

액션물을 좋아하는 액션 키드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은 한국판 '본' 시리즈를 보는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액션이 요란하고, 나쁘게 말하면 할리우드 영화를 닮았다. 북한과 남한, 그리고 아랍계 악당들에게 쫓기는 하정우가 높은 건물을 휙휙 날고, 격투 끝에 달아나는 장면은 영락없이 본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본' 시리즈를 비롯해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오는 007 근작, '미션 임파서블' 등의 액션들이 대부분 잡고 꺾고 비틀며 관절을 공격하는 격투기와 건물과 건물을 건너 뛰며 높은 곳에서 내리 뛰는 야마카시 같은 동작들을 적극 활용한다. 그렇다보니 서로 닮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작품도 최근 액션물의 스타일을 따라가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다만 막판 갈대밭 대결 장면은 테렌스 ..

영화 2013.02.09

26년

조근현 감독의 '26년'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유족들이 모여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단죄하는 내용의 영화라고 해서 기대가 컸다. 실제 역사와 상상을 어떻게 버무렸을 지 궁금했는데, 기대 이하로 실망스럽다. 강풀의 원작 만화를 보지 못해서 영화 내용이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 지 알 수 없지만 영화의 내용은 너무 치졸하다. 제작진의 역사 인식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주인공들의 단죄는 개인의 분노와 복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초반 5.18 항쟁 당시 개개인의 과거 사연을 만화로 처리해 현재 시점의 실사와 차별한 시도는 좋았지만 이후 이야기의 진행은 너무 답답하고 맥이 빠지게 흘러간다. 왜 그리 등장인물들의 사설은 길고 구구절절한 지 일장 연설을 듣는 것 같고, 막상 복수에 나선 행동은 마치 골..

영화 2012.11.30

남영동 1985

타인의 고통을 무덤덤하게 바라본다는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은 참 불편한 영화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실제로 겪었던 고문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는 한마디로 고문의 일대기다. 시종일관 약 2시간 동안 처절하게 울리는 비명 속에 한 남자가 고문 당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한다. 영화는 밑도 끝도없이 시작하자마자 고문실로 잡아들인 남자를 족치며 시작한다. 무슨 영화가 줄거리도 없이 무조건 고문으로 때울 수 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네 과거가 실제로 그랬다. 밑도 끝도 없이 멀쩡히 길가던 사람을 잡아다가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빨갱이를 만든 역사가 있다. 그러니 영화..

영화 2012.11.24

은교 (블루레이)

"너희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은교'(2012년)를 한마디로 설명하는 대사다. 나이 지긋한 노시인이 여고생을 만나 벌어지는 일 때문에 설레임과 슬픔을 느끼는 내용이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 그래서 삶에서 얻고 잃어버리는게 무엇인 지, 다시 못올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그리고 아직도 가슴속 깊이 불씨처럼 타오르는 사랑을 간직한 노년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결코 쉽지 않은 미묘한 감정의 올을 한가닥 한가닥 정성들여 묘사한 정지우 감독의 연출력이 빛났다. 여기에 70대 노인 분장을 한 박해일, 스승과 예술적 갈등을 겪는 제자로 분한 김무일, 17세 여고생을 연기한 김고은 등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 여고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