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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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사 갈란테 'Debut'

이네사 갈란테(Inesse Galante)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1990년대 말, 자주 가던 레코드점에서 새로 나온 클래식 신보를 모아놓은 곳에 그의 앨범 '데뷔'(Debut)가 꽂혀 있었다. 레이블도 생소한 오스트리아의 챔피언이라는 레코드사에서 나온 수입 음반이었다. 이 음반에 눈이 간 이유는 비닐 커버에 붙여놓은 스티커 때문이었다. "감동적인 목소리" 어쩌고 저쩌고 하는 늘 듣는 수식어와 함께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처음 소개한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는 당시 국내에서 그리 낯익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훗날 작곡가가 카치니가 아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바빌로프(Vladimir Vavilov)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워낙 곡 스타일..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이 70대에 만든 '란'(Ran, 1985년)은 셰익스피어 희곡 '리어왕'이 원작이다. 그는 연극으로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장대한 서사 드라마로 탈바꿈시켰다. 줄거리는 '리어왕'의 뼈대를 따르고 있지만 시대 배경, 그림과 캐릭터의 개성 등을 일본 전국시대에 맞춰 독자적으로 구성, 그만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상영 시간이 무려 160분에 이르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원작이어서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으나 의외로 현란한 색감과 시원스러운 구도 때문에 열심히 화면을 쳐다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번에 국내 출시된 DVD 타이틀은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 영상을 지원한다. 오래된 작품인데도 해상도가 약간 떨어지는 것을 제외하고 색감이 비교적 깨끗하다. 그러나 ..

걸 온 더 브릿지

파트리스 르콩트(Patrice Leconte) 감독의 '걸 온 더 브릿지'(The Girl On The Bridge, 1999년)를 잊지 못하는 까닭은 음악 때문이다. 이 작품을 처음 극장에서 봤을 때 강렬한 흑백 영상과 함께 두고두고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한 곡의 노래였다. 남자(다니엘 오테유 Daniel Auteuil)가 여자(바네사 파라디 Vanessa Paradis)를 향해 칼을 던질 때마다 느릿느릿 끊어질 듯 흘러나오던 노래는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Who Will Take My Dreams Away'였다. 삶의 극한까지 몰려 자살을 꿈꾸다 과녁으로 나선 여자와 생존을 위해 불안과 긴장 속에 칼을 던지는 남자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노래는 영상과 잘 어우러져 묘한 ..

코요테 어글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록키' '페임' 플래시댄스' 등 여러 영화의 소재로 쓰였다. 역경을 딛고 이겨내는 성공담은 언제 보아도 짜릿하고 후련한 카타르시스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 감독의 '코요테 어글리'(Coyote Ugly, 2000년)는 2000년대판 '플래시 댄스'다. 시골처녀가 대도시 뉴욕에 올라와 작곡가를 꿈꾸며 밤마다 코요테 어글리라는 술집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바텐더로 일하는 설정은 용접공으로 일하며 발레리나를 꿈꾸는 '플래시댄스' 설정과 흡사하다. 그만큼 이 영화도 음악과 춤이 깔려있어서 시종일관 흥겨울 수밖에 없다. 특히 리안 라임스가 부른 주제가 'Can't Fight This Moonlight'은..

두더지

후루야 미노루(古谷実)의 만화 '두더지'는 우연히 발견한 걸작이다. 만화의 주인공 스미다는 중학교 3학년생. 그렇지만 중학생답지 않은 조숙함으로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의 꿈은 단 하나, 오로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또래 친구들처럼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저 험한 세상에서 한 몸 간수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주인공의 꿈이다. 그래서 그는 꿈을 묻는 친구에게 말한다. "난 두더지처럼 숨어 살 거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삶은 더 할 수 없이 피폐하다. 어머니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렸고 아버지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거리의 부랑자가 됐다. 결국 중3생 스미다는 학교를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이 만화에 10여 년간 장기불황에 허덕인 일본인의 삶이 녹..

2005.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