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1980년 5월은 참으로 평온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광주 민주항쟁을 알지 못했다.

 

남녘땅 광주에서 숱한 목숨이 죽어갔지만 군사정권의 철저한 보도관제로 TV 뉴스나 신문에서는 이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잘 나오면 아무 문제없는 줄 알았다.

 

훗날 작가 황석영이 편찬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대학 총학생회에서 보여준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끔찍했던 실상을 알게 됐다.

책과 영상을 통해 본 진실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잔혹했기에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아마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요즘 세대들에게는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2017년)가 그런 모양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대학 시절 광주 민주항쟁의 기록 영상이나 책을 본 경험이 없어서 영화 속 공수부대원들이 시민을 학살하는 장면이 너무 처참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는 토로였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영화가 모티브로 삼은 실존 인물인 독일의 방송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해 월스트리트 저널의 노만 소프,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등 10여 명의 외신기자들은 당시 총알이 쏟아지는 광주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실을 기록했다.

 

광주 시민들은 이들을 열렬히 응원하고 극 중 택시운전사들처럼 목숨을 걸고 도왔다.
외신기자들이 광주에서 환영을 받은 이유는 국내 언론들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광주의 힘든 싸움을 세상에 알린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광주시민들이 가장 힘들고 슬펐던 것은 그들만의 외로운 싸움으로 그치는 게 아닐까라는 두려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세상 누구의 응원이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모두 죽을 때까지 외롭게 싸운다는 것은 아마 가장 큰 공포였으리라.

 

이 영화가 주목한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정작 국민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 통탄을 어느 외신 기자와 택시운전사, 광주시민들의 입을 빌어 전하고 있다.

 

이 영화가 훌륭한 것은 이 과정을 감정과잉 없이 절제된 영상으로 담담하게 풀어놓은 점이다.

때로는 말 없는 침묵이 대성통곡보다 더 가슴 아픈 것처럼 장 감독의 절제된 영상이 격한 감정의 파고를 만들었다.

 

물론 막판 할리우드 액션 같은 자동차 추격전 등 지나친 부분이 있지만 작은 흠으로 큰 성과를 가릴 수는 없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금남로의 총격 장면이다.

 

장 감독은 이 장면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걸작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계단 학살 장면처럼 몽타주로 처리했다.

군인들이 겨누는 총구와 발사 후 슬로모션으로 튀어 오르는 탄피, 쓰러지는 사람들이 꽃가루처럼 흩뿌리는 핏방울, 거리를 뒹구는 사람들을 잇따라 편집해 보여주면서 강렬한 분노와 슬픔, 공포를 전달한다.

 

더불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최루탄 가스 사이로 우뚝 우뚝 솟은 시위대나 군인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은 이율배반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언뜻 보면 한 편의 동양화처럼 정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이 장면들은 내재된 공포스러운 상황과 충돌을 빚으면서 역설적인 미를 강조한다.

 

이 대목은 장 감독의 이전 영화 '고지전'에서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남북한 군인들이 '전선야곡'을 함께 부르던 대목을 생각나게 한다.
더불어 거리에 나뒹구는 주인 잃은 신발, 돌조각 등을 낮은 앵글로 잡은 영상은 당시 광주가 전쟁터 못지않게 참혹하고 격렬한 투쟁의 공간이었다는 점을 장면 하나로 확실하게 보여줬다.

 

이는 수많은 웅변조 대사들보다 확실한 힘을 발휘했다.
그만큼 장 감독은 영상의 힘을 제대로 알고 이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안다.

 

그러면서 장 감독이 일관되게 유지한 것은 인간애라는 보편적 정서에 대한 호소다.

작품 속 광주 시민들은 거창한 대의명분에 팔 걷고 나선 의사나 영웅이 아닌 본능적 공포와 살고자 하는 기본적 욕구에 반응하는 인간 그 자체로 그렸다.

 

이를 위해 장 감독은 굳이 역사 다큐멘터리처럼 정치인들을 등장시켜 시대 배경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현장의 민초들에 집중했다.
이런 휴머니티에 대한 장 감독의 천착이 이 영화의 성공 포인트 중 하나다.

 

국민배우 송강호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변호사'처럼 과장되지 않은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천상 배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말 택시운전사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훌륭한 생활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압권은 혜은이의 '제 3 한강교'를 부르던 장면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흐르던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따라 부를 때 아주 흥에 겨워 한껏 목소리를 높였던 그가 변곡점이 되는 장면에서 '제 3 한강교'를 부를 때에는 마치 꼭꼭 씹어 밥을 먹듯 정박으로 음 하나하나를 찍어낸다.

마치 동요를 부르는 방식으로 따라 부른 이 노래도 천천히 슬픔이 끓어오르도록 감정을 고양시킨다.

 

1980년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광주시민들에게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것이 있다.

이유가 어찌 됐던 아픔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이다.

 

송강호가 연기한 택시운전사는 이를 대변한다.

극 중 송강호가 광주를 떠나기 전에 눈물을 흘리며 광주 택시기사에게 말하던 "미안합니다"라는 대사 속에는 이런 동시대 사람들의 무거운 부채감이 녹아 있다.

 

더불어 류해진이 연기한 극 중 광주 택시기사의 대사인 "괜찮다. 왜 당신이 미안하냐, 나쁜 놈들이 미안해야지"라는 말로 위로를 받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의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장 감독의 절제된 연출과 뛰어난 영상, 달인의 경지에 이른 송강호의 생활연기 등이 잘 어울려 빛을 발한 수작이다.
이번에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1080p 풀 HD의 2.39 대 1 화면비를 지원한다.

 

화질은 아주 좋다.

매끈한 윤곽선과 자연스러운 색감 등이 잘 표현됐다.

 

다만 의도된 영상이지만 화이트 피크가 좀 높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일부 장면에서는 빛이 과하다 보니 택시 표시등이 보이지 않아 택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DTS HD MA 5.1 채널의 음향은 괜찮은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소리의 방향감이 좋아서 최루탄이 날아오는 방향을 알 수 있으며 리어에서 작렬하는 총소리 등은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부록으로 감독과 송강호 유해진 류준열의 음성해설, 제작과정과 캐스팅, 차량 제작 및 촬영 비화, 영화 음악과 컴퓨터 그래픽, 배우들의 애드리브, 삭제 장면 등이 HD 영상으로 수록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극 중 주인공이 운전하는 택시의 차종은 1980년 초반에 흔히 다니던 기아 브리사 X1000이다. 제작진은 이 차를 구할 수 없어 브리사의 원형이 된 일본 마츠다의 파밀리아 차량을 사용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로 통하던 위르겐 힌츠페터는 KBS 같은 독일 제1공영방송(ARD-NDR)의 기자였다. 1960년대 월남전 당시 종군기자로 취재하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극 중 주인공은 힌츠페터 기자에게 가짜 이름인 김사복을 적어 주지만 실제 힌츠페터를 도와 광주에 달려간 인물의 본명이 김사복이었다.

힌츠페터 기자를 연기한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독일군 장교로 출연. 그가 쓴 색안경은 실제 힌츠페터 기자가 광주 취재 당시 썼던 안경이다. 유가족이 이를 빌려줬다.

택시가 질주한 호남고속도로 장면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 폐쇄된 구간에서 촬영.

광주적십자병원 장면은 현재 폐쇄된 서남대병원에서 촬영. 5.18 당시 실제로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곳에서 찍었다. 이 곳은 5.18 사적지이기도 하다.

광주역 광장 장면은 블루 스크린을 배우들 주위에 두르고 촬영한 뒤 건물과 주변 풍경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 넣었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금남로 시위 장면도 컴퓨터 그래픽이다.

최루가스가 자욱한 금남로 시위 장면은 광주시에서 제공한 부지에 금남로 세트를 만들어 찍었다. 제작진은 실제 금남로 도로폭과 동일한 세트를 만들었고 연무를 뿌려 최루가스 효과를 냈다.

제작진은 대본 작업 단계에서 송강호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뒀다. 그러나 송강호는 좋은 연기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한 번 고사했다.

힌츠페터는 1987년 6월 항쟁 때도 취재를 하다가 경찰에게 맞아 목과 척추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힌츠페터는 광주 민주항쟁 당시 광주를 두 번 찾았다. 두 번째 방문 때에도 김사복씨가 광주 상황을 브리핑하고 안내를 했다고 한다.

검문소를 지키던 군인이 이들을 일부러 무사통과시킨 대목도 실화다. 영화 개봉 후 김사복씨의 유족이 나타나 실제 김사복씨의 존재가 확인됐다. 서울에서 콜택시 사업을 했던 그는 1984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산 인근 산간 도로에서 촬영한 차량 추격 장면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유발하기는 했지만 좀 과한 측면이 있다. 실제 이런 추격 장면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촬영은 '내부자들' '범죄와의 전쟁' '관상' 등을 찍은 고낙선 촬영감독이 담당.

영화의 발단은 2003년 힌츠페터 기자가 한겨레신문의 송강호 언론상 수상 기사였다. 이를 본 제작진이 관심을 갖고 영화를 제작하게 됐다. 장 감독은 힌츠페터 역할로 토머스 크레취만을 바로 꼽았다.

생전에 김사복을 다시 만나기 위해 애타게 찾던 힌츠페터 기자는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 단계인 2016년 1월 79세를 끝으로 타계했다. "광주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손톱과 머리카락 등 일부가 광주 망월동 묘역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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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울프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