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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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 룸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 콘래드 홀(Conrad W. Hall), 다리우스 콘지(Darius Khondji), 데이비드 코프(David Koepp, 하워드 쇼(Howard Shore)... 이름만 늘어놓아도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거장들이다. 이들이 함께 한다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나올까. 그 즐거운 상상을 실행에 옮긴 작품이 바로 조디 포스터(Jodie Foster)가 주연을 맡은 스릴러 '패닉 룸'(Panic Room, 2002년)이다. 이 작품에서 핀처는 감독을 맡았고 콘래드 홀과 다리우스 콘지는 촬영을, 데이비드 코프는 각본을, 하워드 쇼는 음악을 담당했다. 핀처는 '세븐' '에이리언 3' '파이트클럽' 등을 만든 스릴러에 일가견 있는 감독. 데이비드 코프는 '쥬라기 공원' ..

백야

1986년 한국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그 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영화가 국내 개봉했다. 테일러 핵포드(Taylor Hackford) 감독의 '백야'(White Nights, 1985년)다. 당시 서울에서 유일한 70미리 상영관이었던 대한극장에서 이 영화를 하루에 내리 3번을 보았다. 새내기 대학생 때인 만큼 할 일이 많았던 친구는 첫 회를 같이 본 후 후다닥 달아나버렸지만 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와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의 노래에 매료돼 움직일 수 없었다. 이후 바리시니코프의 팬이 돼 그가 출연한 영화 '지젤'도 보았고 나중에 '백야'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영상이 뭉개질 때까지 봤다. 비소츠키 노래도 마찬가..

지상 최대의 작전

우리에게 6월 6일은 현충일이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불리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던 날, 즉 D-Day였다. 당시 미, 영, 프랑스 연합군은 이 작전을 계기로 나치 독일을 꺾을 수 있었던 만큼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매년 6월 6일이면 당시 연합국들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모여 기념식을 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그린 흑백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1962년)은 제목에 걸맞게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은 지상 최대의 영화다. 코넬리우스 라이언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300만 명의 엑스트라와 1만 1,000여 대의 전투기, 400여 척의 실제 전함이 동원됐다. 감독만 대릴 자눅(Darryl ..

몬스터주식회사

픽사 스튜디오가 '토이스토리'에 이어 내놓은 두 번째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Monster's Inc, 2001년)는 픽사의 경이로운 3D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털북숭이 괴물 셜리의 미세한 털 움직임을 보면 절로 감탄하게 된다. 픽사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해 셜리의 털들이 바람이나 움직임, 충격 등에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 짐승의 털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움직임이 신기하고 색깔은 화사하지만 줄거리가 그저 그렇다. 즉, 이야기가 주는 재미는 떨어지는 편. 여기에 언제나 사회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항상 즐겁고 행복하게 웃기만 하라는 디즈니 특유의 메시지는 변함없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개봉 당시 꽤 흥행했는데,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감독의 이름을 알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은 찌는듯한 한여름 날씨처럼 권태롭고 답답한 소시민의 일상을 다룬 수작이다. 유명하지 못한 소설가 효섭(김의성),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유부녀 보경(이응경), 그런 효섭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민재(조은숙), 묵묵히 민재를 짝사랑하는 민석(양민수) 등 등장인물들은 일과 사랑 어느 것 하나 쉽게 풀지 못하고 힘든 나날을 보낸다. 영화전문기자 오동진은 이 영화를 가리켜 1990년대 들어와 꿈을 잃어버린 1980년대에 20대였던 세대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면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꿈을 접은 1980년대 학번들을 다룬 노래다. 정태춘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