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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블루레이)

울프팩 2018. 10. 3. 16:31

2.28 사건으로 기억되는 대만의 1947년은 암울했다.

1947년 2월 28일에 발생한 이 사건은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소속 관료가 정부 독점 판매품인 담배를 타이베이시에서 몰래 팔던 대만섬 출신의 노파를 마구 때려죽이면서 벌어졌다.

 

당시 대만에서는 외성인이라고 부르던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장개석의 국민당 사람들과 내성인으로 통하던 대만 본토박이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장개석은 중국 본토에서 모택동이 이끌던 공산당에게 연일 패배해 쫓겨날 처지여서 피난처로 대만을 생각하고 국민당군을 보내 정지작업을 벌였다.

 

결국 1947년에 장개석의 국민당은 중국 본토를 잃고 대만으로 허겁지겁 피신했다.

그러니 당연히 외성인과 내성인 사이에 갈등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 갈등이 폭발한 것이 2.28 사건이었다.

노파 살해 사건을 계기로 들고일어난 내성인들을 외성인, 즉 국민당군이 잔혹하게 총칼로 진압했다.

 

대만 2.28 기념재단에 따르면 당시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된 사람이 1만 8,000~2만 8,000명에 이른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내성인을 억압하던 외성인에 대한 정치적 항거였으나 결과적으로 내성인들이 완전히 꺾이면서 국민당의 지배구도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전개 구도는 장개석을 정점으로 한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반공과 경제개발을 국시로 삼아 독재를 정당화했던 1960, 70년대 박정희 정권처럼 폭압적이며 암울한 반공 군사 문화가 대만 사회를 짓눌렀다.

 

대만의 에드워드 양 감독이 만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牯嶺街少年殺人事件, 1991년)은 이런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한 대만 영화다.

1960년대 대만의 청소년들은 여전히 폭압적인 군사문화 속에서 억눌린 삶을 살았다.


탱크를 앞세운 군사 훈련이 일반 도로에서 예사롭지 않게 열리며 학생들은 학교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한 통제를 받으며 생활했다.

획일성을 강조하는 교복과 두발 통제 등 군사문화의 잔재 속에 살아가는 대만 학생들의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는 한술 더 떠서 교련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에서 제식 훈련과 목총을 이용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창 피가 끓어오를 나이에 억눌린 삶을 살던 대만 청소년들에게 삶의 위안이자 돌파구는 달콤한 사랑을 읊조린 미국의 팝과 당구 같은 유흥문화였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은 패를 갈라 싸움을 벌였다.

대만이나 우리나 학교 폭력은 정치체제가 빚어낸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이런 1960년대 대만 학생들의 답답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와중에 주인공은 한 소녀를 좋아하게 되고, 이 소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영화의 주요 기둥이 된다.


하지만 단순 소년소녀의 사랑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엇나가고 비극으로 치닫는 것은 각 개인의 삶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을 굴곡지게 만든 시대상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암울했던 1960년대 대만의 모습을 청소년들의 성장기를 통해 보여준다.

안보라는 미명 아래 이유 없이 끌려간 아버지가 며칠을 갇혀 자술서를 쓰는 모습은 과거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 안기부, 보안사 등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비록 대만영화이지만 상당히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한 민족이 두 국가로 갈려 대치한 정치 군사적 상황과 그 속에서 개인의 삶을 희생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처지들이 상당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결코 즐겁고 아름답던 시절이 아닌 만큼 영화는 상당히 어둡고 무겁다.

심지어 상영 시간이 4시간에 이를 만큼 이야기 또한 지난하다.


따라서 어지간한 영화광이 아니라면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기도 벅차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묵직한 앙금 같은 것이 가슴속에 남는다.


험난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에 대한 동병상련 같은 아픔이다.

그래서 소화하기 쉽지 않은 영화인데도 끝나고 나서 계속 곱씹게 되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더욱이 이 영화가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이 놀랍다.

영화의 동기가 된 1961년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동급생 소녀를 살해한 사건은 대만이 생긴 이래 최초로 발생한 미성년자 살인사건이어서 많은 화제가 됐다.


살인을 저지른 소년은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됐다.

영화 속 주인공과 동갑내기인 에드워드 양 감독이 하필 이 사건을 영화의 소재로 삼은 것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아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치 숨어서 관찰하는 듯한 카메라 앵글이나 등장인물들의 뒤를 밟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지만 거꾸로 감독의 시선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마치 감독이 '나도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웅변하는 듯한 카메라 움직임이다.


더불어 이 영화에서 또 다른 놀라운 발견은 주인공 소년을 연기한 배우 장첸이다.

'와호장룡' '해피투게더' '2046' 등에 출연한 대만의 유명 배우인 장첸은 이 작품 출연 당시 14세였다.


배우는커녕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무명 소년이었다.

실제 아버지인 배우 장국주가 영화 속에서 아버지 역할로 출연하면서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출연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신인답지 않게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풋풋한 아마추어의 냄새가 나지만 오히려 말수 없고 내성적인 소년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잘 소화했다.


어린아이지만 지금의 얼굴 모습이 보여서 반가웠다.

이 작품은 최근 블루레이로 국내 출시됐다.


그다지 대중성 있는 작품이 아닌데도 블루레이로 출시돼 반갑다.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영화 디스크와 음악을 수록한 OST 등 2장으로 구성됐다.


1080p 풀 HD의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지 않다.

윤곽선이 두껍고 지글거림이 심하며 디테일이 떨어진다.


전체적으로 화면도 어두운 편이다.

음향은 DTS HD MA 2.0 채널을 지원한다.


부록으로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과 예고편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에드워드 양 감독은 194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대만으로 옮겼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대만의 국립교통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14세 무명 소년 장첸이 주인공을 맡았다. 프로듀서 유 웨이엔이 장첸의 아버지 장국주에게 장첸의 출연을 제안했다.

장첸의 아버지 장국주도 배우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장첸의 아버지 역할로 나온다. 장첸의 형 장한도 출연했다.

도처에 이념 대립의 잔재와 갈등, 군사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대만의 뉴 웨이브 감독 중 유일하게 영화 교육을 받지 않았고 현장 경험이 없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Don't be cruel', 'Are You Lonesome Tonight', 로이 오비슨의 'Only The Lonely', 버디 홀리의 'Peggy Sue' 등 1950, 60년대 미국 팝송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여주인공을 연기한 양정이. 그의 영화 출연작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나중에 미국 TV 시리즈 'One Life to Live'에 출연했으며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해 뉴욕에 정착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의 '아귀레 신의 분노'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USC 영화학과를 잠시 다니기는 했으나 할리우드 영화 위주로 가르치는 것에 실망해 그만뒀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비 오는 밤에 칼부림이 벌어지는 장면에서 아키라 감독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내레이션이 자주 등장. 한 발 떨어진 관찰자적 시점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사람들이 다니는 도로 위로 전차와 장갑차가 이동하는 등 일상생활 속에 군대가 함께 녹아 있다.

상영 시간만 긴 것이 아니라 영화 초반은 물론이고 아주 긴 롱 테이크가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롱 테이크 키스 장면도 있다.

이 작품은 뒤늦게 2017년에 국내에서 상영됐다.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을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상영했다. 그런데도 블루레이 타이틀의 화질은 많이 떨어진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필름 파운데이션이 크라이테리언과 함께 공동으로 이 작품의 디지털 복원작업을 진행했다.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2Disc BD OST 풀슬립 A 한정판) : 블루레이
에드워드 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2Disc BD OST 풀슬립 B 한정판) : 블루레이
에드워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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